케이지가 남긴 강연과 글의 정수 모은 신간 '사일런스'
'무정형성의 음악'으로 유명한 천재 존 케이지(1912~1992)는 서양 현대 음악사에서 진정 자유로운 작곡가로 꼽힌다.
'주역'(周易)을 접한 뒤 충격을 받고 작곡한 '4분33초'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음높이와 소리를 모두 배제했다. '주역'을 토대로 음 길이만을 정해 그야말로 파격적인 곡을 썼다.
그랜드피아노의 현 위에 나사나 볼트 등을 부착한 악기도 발명했다. 음높이가 불확정적인 타악기 '프리페어드 피아노'다.
또 불교 선(禪) 사상을 활용해 실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케이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변화의 욕구와 예술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음악이라는 장르를 훌쩍 넘어섰다.
그의 감성과 철학은 무용, 미술, 건축, 연극, 영화,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그는 '음악철학자'로 종종 불렸다.
덩달아 그에 관한 책, 인터뷰, 기사까지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국내에서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이 가장 존경하는 예술가로 종종 소개됐다. 백남준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나의 인생에 영향을 준 사람을 네 명 정도 꼽을 수 있는데 그중 케이지의 분량이 95%"라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케이지는 음악만큼이나 글을 사랑했다. 선 사상을 담은 '무(無)에 관한 강연' '유(有)에 관한 강연' 등의 글은 음악 같은 리듬 구조 안에서 구성돼 세계 문화예술계에 상당한 충격을 던졌다.
예를 들어 '무에 관한 강연'은 한 행이 4마디로 이뤄졌으며 리듬 구조의 한 단위는 12행이다. 전체는 5개의 큰 부분이며 7, 6, 14, 14, 7이라는 비율로 나뉘고 각 단위를 구성하는 48마디 역시 같은 비율로 나뉘었다.
그간 이 같은 그의 저서는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인터뷰집 '케이지와의 대화'(1996년)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진면목을 온전히 담은 책은 번역되지 못했다.
케이지에 대한 국내 연구의 저변이 넓지 않은 탓에 번역 과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서다.
이 때문에 최근 국내 번역된 '사일런스'(원제: Silence)는 케이지의 음악 세계와 철학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책은 1937년부터 1961년 사이에 쓰인 기고문, 에세이, 강연문 등 23편을 담았다. 케이지가 쓴 글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총망라됐다.
현대음악, 실험음악, 실험음악사, 무용, 예술가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기존 예술가들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 개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소리와 소음, 무와 유, 사유와 현상, 우연과 필연, 정확성과 부정확성 등의 경계를 오갔다.
글 배열 방식도 무척 독특하다. 케이지는 악보에 음표를 그려 넣듯이 다양한 형식으로 텍스트를 실험했다.
'무에 관한 강연' '유에 관한 강연'을 비롯해 케이지가 작곡 때 사용했던 우연성의 작업을 활용한 '음악과 무용에 관한 2쪽의 지면과 122개의 단어', 교향곡 악보를 방불케하는 '한 명의 화자(話者)를 위한 45분' 등을 담았다.
내용 분석이 쉽지 않은데다 형식마저 예사롭지 않아 번역 작업에 남다른 공을 들여야 했다. 기획부터 발간까지 3년 넘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블러드 차일드', '집단 기억의 파괴' 등을 번역한 나현영 씨가 한글로 옮겼다.
책 기획자인 김영훈 안나푸르나 출판사 대표는 "번역을 하려면 '영문 주역' 등 케이지가 참고한 책까지 모두 찾아서 연구를 해야 했는데 국내에 케이지 관련 논문이 많지 않았다"며 "이렇게 번역을 한 뒤 원본 형식에 맞게끔 문장을 다듬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한글 서체에 맞춘 디자인 작업도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몇 년에 걸쳐 까다로운 번역 작업에 매달린 것은 일종의 사명감 때문이었다"며 "백남준을 이해하려면 케이지를 공부해야 하는데 케이지와 관련된 책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현실은 문제라고 느꼈다"고 덧붙였다.
일반 독자라면 다소 낯설게 느낄 수 있지만 찬찬히 문장을 음미해 가다보면 예술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다. 버섯과 음악을 빗대어 설명한 '음악 애호가들을 위한 현장 안내서'처럼 곳곳에 녹아있는 유머와 역설을 즐기는 재미도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7002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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