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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일까, 암호일까… 케이지의 전위적인 글쓰기 [경향신문 2014-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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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비평가인 카일 갠은 <사일런스>의 출간 5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존 케이지(1912~1992)에 얽힌 일화를 전한다. 한번은 케이지가 사는 아파트의 화재경보장치가 고장나 밤새 울렸다 꺼졌다 하기를 반복했다. 모든 주민들이 밤을 지새웠지만 케이지만은 숙면을 취했다. 케이지는 말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벨 소리의 패턴에 귀 기울이며 그 소리를 내 사고와 꿈에 섞었네. 덕분에 푹 잘 수 있었지.”
케이지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다. 한국 태생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은 존 케이지를 예술적인 ‘아버지’로 받들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이 미국 뉴욕으로 기반을 옮긴 것도 케이지 때문이었다.
<사일런스>는 1961년 출간된 케이지의 첫 저작이다. 1937~1961년 사이에 쓰인 기고문, 에세이, 강연문 등 23편을 모았다. 음악으로 유명한 케이지지만 그의 전위적인 형식 실험은 글에서도 나타난다. 어떤 글은 읽다 보면 이것이 문장인지 뜻모를 기호인지 난감할 정도다. 글의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다.
<사일런스>에선 활자의 크기,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 자판의 탭(tab) 버튼을 잘못 누른 듯 엉뚱한 곳에서 띄어쓰기 간격이 바뀌거나 행이 갈리는 경우도 있다. ‘무에 관한 강연’과 ‘유에 관한 강연’은 작곡하듯 리듬을 살려 쓰였다. 행을 몇 개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마치 음표 대신 단어를 배치한 듯하다. 형식 면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은 ‘한 명의 화자를 위한 45분’이다. 케이지는 한 행을 읽는 데 드는 시간, 전체 글을 읽는 데 드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한 후 독자에게도 그대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치 희곡의 지문처럼 글 중간의 괄호 안에 ‘코를 곤다’ ‘팔꿈치로 기댄다’ ‘탁자를 꽝 친다’ ‘머리를 빗는다’ 등 화자의 행동을 지시하기도 한다.
케이지의 작품 중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아무래도 ‘4분33초’가 될 듯하다. 피아니스트가 등장해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가 몇 분 후 닫는다. 물론 피아니스트는 건반 하나 누르지 않는다. 어딘지 불편해하는 관객의 한숨 소리, 기침 소리 등이 ‘4분33초’를 구성한다. 케이지는 <사일런스>에서 정작 이 작품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하지 않지만 음악, 소음, 무음에 대해서는 설명한다. 케이지는 무향실(無響室)에 들어간 체험을 전한다. 그는 그곳에서 분명히 두 가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케이지가 이 소리의 정체에 대해 묻자 엔지니어는 높은 소리는 케이지의 신경계가 작용하는 소리, 낮은 소리는 케이지의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알려주었다. 케이지는 깨달음을 얻는다. “죽을 때까지 소리는 나를 떠나지 않는다. 죽은 후에도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음악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4분33초’와 같은 음악을 작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그것을 ‘작곡’이라고 할 수 있긴 할까. 케이지는 작곡을 ‘인생의 긍정’이라고 표현한다. 그에게 작곡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거나 창조를 통해 진보를 이루려는 시도가 아니라 단순히 우리가 사는 인생 자체를 일깨우는 방식”이다. 케이지는 “욕망과 생각을 버리고 물 흐르듯 흘러가게 두면 우리 인생은 매우 근사해진다”고 덧붙인다.
<사일런스>에서는 선불교가 케이지에 미친 영향도 찾을 수 있다. 현대 음악에 대한 화두를 내리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있고 주변 사람들의 일화도 마치 화두를 풀듯 역설적으로 서술됐다. 제자가 묻는다. “이런 게 ‘음악’이긴 한 겁니까?” 스승이 답한다. “아! 너는 결국 모음과 자음으로 이루어진 소리를 좋아하는 게로구나. (…) 그러다가는 완전한 귀머거리처럼 바로 앞에서 나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제 스승인 쇤베르크와의 일화를 통해선 케이지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자신에게 2년간 배운 케이지에게 쇤베르크는 작곡을 하려면 “화성학에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케이지가 화성학에 소질이 없다고 고백하자, 쇤베르크는 “그렇다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지가 다시 답했다. “그렇다면 그 벽에 머리를 박는 데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케이지는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매번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발표했다. 최우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는 <사일런스> 말미에 붙은 해설에 “양식들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현대 음악 작곡가들의 예술적, 더 나아가서는 현실적 생존의 근거가 되어 왔다. 따라서 거기에서 자유롭기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썼다. 그런 의미에서 매번 자신의 양식을 파괴한 케이지는 유례없이 자유로운 작곡가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112044025&code=960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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